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전도의 굴욕 (문단 편집) == 개요 == ||[youtube(MguWGGiDZRc)]|| >被擄子女望見, 號哭皆曰: "吾君、吾君, 捨我而去乎?" 挾路啼號者, 以萬數。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청으로 인질, 노예 등으로 끌려가는 사람을 이름)가 만 명을 헤아렸다. >---- >ㅡ[[조선왕조실록|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30_002|#]] [[1637년]] [[2월 24일]](인조 15년 음력 1월 30일)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의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였다. 하지만 청군이 길을 막아 강화도로 갈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한다. 그러나 성내의 물자가 떨어지자 끝내 [[청나라]]와 치욕스러운 강화(말이 강화조약이지 항복이나 다름없었다)를 맺으니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실록]]의 기록([[효종실록]], [[현종실록]] 등)을 보면, 정축년 정월(1월)에 [[남한산성|성]]에서 내려왔다는 의미로 단순히 '''정축하성([[정축|丁丑]][[下]][[城]])'''이라고만 표기했다. 그나마 실록에 기재되긴 했지만 병자호란 전후의 사정을 보고 이 표현을 곱씹는다면 실제보다 엄청나게 순화했다고 느낄 정도로 비교적 [[검열삭제]]해서 쓰인 편. 본 문서의 제목인 '삼전도의 굴욕'으로 본 사건 표기가 정착된 정확한 때는 알기 어렵다. 민간에서 이미 "삼전도에서 당했던 욕(辱)"이라고 에둘러 부르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1945년 해방 이후 전근대 역사를 정돈하며, 또는 역사문학이 성행하며 지금에 이르렀다고 보기도 한다. 삼전도(三田渡)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및 [[석촌동]] 부근에 있던 하중도의 나루터였다. 지금 그곳은 개천을 메워 섬이 아니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적어둔 비석인 [[삼전도비]]가 원래 세워진 위치와는 다른 위치에 남아있었는데 2007년 페인트 또는 스프레이로 테러가 있은 후 2010년 복원하여 원래 있었던 위치인 롯데월드 석촌호수 근처로 돌아갔다. 1910년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조선왕조 최대의 굴욕으로 취급되었다.''' 한낱 번국 오랑캐라며 무시한 여진족의 나라, 청나라에게 만인지상의 [[인조|임금]]이 머리 박고 항복했으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